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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09.12

새 떼의 움직임은 어디에 쓰여 있는가

Boids의 국소 규칙과 필립 갤런터의 복잡계 논의를 따라 미디어아트의 창발을 살핀다. 미리 정한 군무, 무작위 변화, 이웃 간 상호작용을 구별하고 작품 설명과 제작 실험에 적용할 기준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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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한 작은 조각들이 여러 흐름을 이루는 창발 개념 이미지

커버는 GPT Image 2로 생성한 개념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실제 작품이나 시뮬레이션 실행을 기록한 이미지가 아니다.

화면 속 새 떼를 움직이려면 모든 새의 비행 경로를 미리 그려야 할까. 크레이그 레이놀즈(Craig Reynolds)의 1987년 논문은 바로 이 애니메이션 제작 문제에서 출발한다. 새 한 마리씩 경로를 지정하는 대신, 각 개체가 주변을 감지하고 정해진 행동 규칙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떼의 움직임은 개별 행동들이 맞물리는 과정에서 생긴다. 논문 초록은 이 차이를 경로를 직접 작성하는 방식과 분산된 행동 모델의 차이로 설명한다.

이 장면은 미디어아트에서 자주 쓰는 ‘창발’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작가가 모든 순간의 모양을 정하지 않았는데도 화면 전체에 흐름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모두 창발인 것은 아니다. 미리 준비된 장면을 우연히 선택해도 제작자는 놀랄 수 있고, 서로 관계없는 점들을 무작위로 흩뿌려도 잠시 의미 있는 형상이 보일 수 있다.

생성 도구로 복잡한 이미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지금, 이 구분은 작품 설명의 정확성과 연결된다. ‘스스로 질서를 만든다’는 문장은 화면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뿐 아니라 그 인상을 만든 과정까지 주장한다. 그 과정을 설명하려면 완성된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작은 단위들이 서로 무엇을 주고받는지 보아야 한다.

가까운 이웃만으로 만들어지는 군집

레이놀즈는 Boids 소개에서 1986년에 모델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기본 모델에는 세 가지 조향 행동이 있다. 가까운 개체와 너무 붙지 않도록 피하는 분리(separation), 이웃들의 평균 진행 방향에 맞추는 정렬(alignment), 이웃들의 평균 위치 쪽으로 이동하는 응집(cohesion)이다. 이것은 완성된 새 떼의 외곽선을 따라가라는 명령과 다르다. 각 개체는 주변 관계에 대응하며 다음 움직임을 조절한다.

여기서 ‘주변’은 막연한 말이 아니다. 소개문은 이웃의 범위를 거리와 비행 방향에 대한 각도로 설명한다. 프로그램이 장면 전체의 기하 정보를 보유하더라도, 군집 행동에는 정해진 이웃 범위 안의 개체들만 영향을 주도록 한다. 전체 정보를 보유하는 것과 행동에 사용하는 것은 별개다. 이 제한이 있어야 개별 반응들이 연결되어 전체의 움직임을 만드는 경로를 살필 수 있다.

다만 Boids를 완전히 통제 없는 자연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같은 소개문은 초기 실험에 장애물 회피와 목표 추종이 포함됐으며, 애니메이션에서는 우선순위가 낮은 목표 추종 행동으로 떼가 미리 작성된 경로를 따르게 했다고 명시한다. 국소적인 군집 행동과 전체 이동 방향에 대한 연출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국소 상호작용에서 나온 움직임과 작가가 부여한 경로를 분리해 설명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창발은 이러한 미시 규칙과 거시 패턴의 관계다. 개체 수준의 규칙과 상호작용으로 더 큰 규모의 조직된 행동이 나타나는 경우를 살핀다.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 전체나 대규모 AI 모델의 능력에 관한 논쟁을 이 사례 하나로 결론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Boids는 군집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계산 모델이며, 실제 새의 행동을 모두 설명한다는 주장도 여기에는 필요하지 않다.

무작위가 많다고 복잡해지는 것은 아니다

필립 갤런터(Philip Galanter)는 2003년 논문 《What is Generative Art? Complexity Theory as a Context for Art Theory》에서 생성예술을 시스템을 활용하는 제작 방식으로 설명한다. 자연어 규칙이나 프로그램, 기계 같은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작동해 작품 형성에 기여한다는 정의다. 중요한 경계는 생성예술이라는 넓은 범주 안에 단순한 시스템과 복잡한 시스템이 모두 들어간다는 점이다. 생성적이라는 사실만으로 창발까지 입증되지는 않는다.

갤런터가 복잡계에서 주목하는 것은 많은 구성요소의 국소 상호작용, 그리고 중앙의 세부 지시 없이 형성될 수 있는 조직이다. 그는 완전히 규칙적인 상태와 완전히 무작위적인 상태를 모두 단순한 쪽에 놓고, 질서와 무질서가 섞이는 양상으로 복잡성을 설명한다. 화면을 더 어지럽게 만들수록 복잡성이 높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변화가 이어지면서도 어떤 관계나 구조가 유지되는지가 관건이다.

이를 전시장 화면에 적용하면 관찰의 단위가 바뀐다. 한 프레임에서 점들이 우연히 새처럼 보였다는 것과, 개체들의 거리가 계속 조정되며 군집이 유지된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전자는 관객이 발견한 닮음일 수 있다. 후자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지되는 관계를 설명한다. 정지 화면 한 장만으로는 이 차이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갤런터는 결정론적 시스템에서도 장기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하며 혼돈과 무작위를 구별한다. 작가가 결과를 미리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규칙이 없다는 사실은 같지 않다. 반대로 작가가 이미 본 적 없는 영상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성 과정에 어떤 창발적 조직이 있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복잡성은 작품의 우열을 정하는 점수가 아니다. 갤런터 역시 복잡한 시스템을 쓰는 예술이 단순한 시스템을 쓰는 예술보다 반드시 더 낫다는 결론을 거부한다. 정해진 반복이나 직접 안무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유효한 선택이다. 창발이라는 용어를 붙이지 않아도 작품은 충분히 설득력 있을 수 있다.

화면을 닮게 만드는 일과 규칙을 비교하는 일

창발을 제작과 비평에 적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교를 제안한다. 이는 앞선 저자들이 정한 표준 시험법이 아니라, 국소 규칙과 전체 결과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실습 구상이다.

같은 화면에 비슷한 수의 움직이는 점을 놓되, 한쪽에서는 각 점이 미리 작성된 경로를 따르게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웃 관계에 따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두 화면이 비슷한 군무를 보인다고 해서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목표는 지정된 경로를 얼마나 잘 재현하는지에 있고, 후자의 관찰 대상은 개별 규칙이 어떤 집단적 패턴을 만드는지에 있다. 이 비교만으로 예술적 가치를 판정하지는 않는다.

이웃 기반 장면에서는 다른 조건을 가능한 한 유지한 채 이웃 범위나 정렬의 강도처럼 한 요소를 바꾸어 볼 수 있다. 군집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 개체 사이의 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먼저 정하고 관찰한다. 바뀐 결과가 예상한 관계를 보여 준다면 해당 규칙이 패턴 형성에 기여한다는 설명을 뒷받침한다. 한 번의 변화가 원인 전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초기 배치가 달라져도 같은 설명이 유지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때 가장 아름다운 실행 하나만 남기면 검토 범위가 좁아진다. 군집이 형성되지 않았던 장면, 지나치게 한쪽으로 몰린 장면도 함께 보면 시스템이 무엇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무엇을 우연에 맡기는지 드러난다. 모든 실행을 공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 소개에 쓰는 주장의 크기에 맞게 비교 근거를 보존하자는 제안이다.

전역 제어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입자들이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다고 해서 제어 방식까지 분산된 것은 아니다. 각 입자에 완성된 목표 위치를 배분하는 장치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국소 상호작용으로 군집이 형성된다’는 설명과 ‘지정된 형태로 입자들을 이동시킨다’는 설명을 구별해야 한다. 둘을 결합한 작업에서는 어느 부분을 미리 정했고 어느 부분을 상호작용에 맡겼는지 밝히면 된다.

전시 설명에 남겨야 할 작가의 선택

관객에게 작품의 모든 계산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시가 자율성이나 창발을 핵심으로 내세운다면, 기술 설명은 그 주장에 맞는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웃 간 거리와 방향이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지, 전체 경로는 작가가 지정했는지, 현재 보이는 화면이 실시간 실행인지 선택된 녹화인지가 해석을 바꾼다. 녹화를 전시한다고 해서 생성 과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이 지금 새로운 실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주장은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 기준은 창작코딩 수업과 미디어아트 기획에도 쓸 수 있다. 완성 화면을 닮게 만드는 과제에 더해, 하나의 규칙을 바꾸었을 때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하게 할 수 있다. 출품 설명에서도 ‘예측 불가능한 생명체’라는 넓은 표현보다 실제로 구현한 반응과 남아 있는 연출의 범위를 적는 편이 관객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준다. 이는 특정 전시의 성과를 보고하는 말이 아니라 제작과 해설에 대한 제안이다.

작가의 역할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개체를 만들고 무엇을 이웃으로 인정할지 정하는 순간 이미 선택이 개입한다. 관객에게 보여 줄 시간과 화면의 크기를 고르는 일은 어떤 집단적 패턴을 보게 할지에 영향을 준다. 창발은 작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작가의 선택이 완성된 형태뿐 아니라 상호작용의 조건에도 놓여 있음을 살피는 개념이다.

새 떼의 외곽선이 코드에 그려져 있지 않더라도, 가까움의 범위와 움직임의 제약은 그 안에 남아 있다. 그 선택을 읽을 수 있을 때 관객은 군무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것이 생겨나는 조건을 생각하게 된다. 작품 설명이 답해야 할 것은 ‘누가 모든 새를 움직였는가’만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허용했기에 이 움직임이 나왔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