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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08.17

예술과 엔지니어는 어디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나

E.A.T.가 《9 Evenings》 이후 예술가와 엔지니어를 연결하는 Technical Services Program과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의 물리적·사회적 조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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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과 광학 장치, 반사 돔이 놓인 어두운 공연 실험실

1966년 뉴욕의 69th Regiment Armory에는 무용수와 음악가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천장과 무대 사이로 케이블이 이어졌고, 무선 송신기와 조명 제어 장치, 센서와 프로젝션 장비가 공연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9 Evenings: Theatre and Engineering》에는 John Cage, Lucinda Childs, Robert Rauschenberg, Yvonne Rainer, David Tudor를 포함한 10명의 예술가와 Bell Laboratories의 엔지니어 약 30명이 참여했다. 예술가와 엔지니어는 짝을 이루어 각 공연에 필요한 기술 요소를 함께 만들었다.[1]

이 행사를 새 장치를 대거 선보인 역사적 무대로만 보면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여러 분야의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리허설하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요구를 기술 언어로 옮기며, 장치가 실패할 때 작품의 구성을 다시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 관계가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도록 이어 갈 조직이 생겼다.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E.A.T.)는 기술을 작품에 공급하는 업체 역할을 넘어, 예술가와 엔지니어가 만날 조건을 만드는 비영리 조직을 표방했다.[2]

한 번의 공연에서 협업 인프라로

Daniel Langlois Foundation의 E.A.T. 아카이브에 따르면 엔지니어 Billy Klüver와 Fred Waldhauer, 예술가 Robert Rauschenberg와 Robert Whitman은 《9 Evenings》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6년 E.A.T.를 설립했다. 이들이 확인한 문제는 아이디어의 부족이 아니었다.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을 다루려 해도 적절한 엔지니어를 만나기 어려웠고, 엔지니어가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려 해도 회사와 연구소의 장비, 시간, 승인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지속적인 협업에는 개인적 친분보다 물리적·사회적 조건이 필요했다.[2]

E.A.T.는 뉴욕에 사무실을 두고 예술가와 엔지니어에게 회원 자격을 열었다. 아카이브는 1969년 무렵 예술가 회원과 협업 의사를 밝힌 엔지니어 회원이 각각 2,000명을 넘었고, 지역 그룹도 15~20곳가량 생겼다고 기록한다.[2] 숫자가 협업의 질까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규모를 보면 예술과 산업 연구소 사이의 접촉이 더 이상 몇몇 유명인의 예외적 인맥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직의 일은 사람 목록을 쌓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예술가의 요청을 받고 필요한 분야의 전문가를 찾고, 장비를 빌려 주며, 홀로그래피와 레이저, 컴퓨터 이미지 같은 신기술을 설명하는 포럼을 열었다.[3] 협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요청을 번역하고 적합한 상대를 찾는 중개가 필요했고, 진행 중에는 장비와 지식에 접근할 경로가 필요했다. E.A.T.는 그 보이지 않는 준비 작업을 조직의 역할로 삼았다.

심사보다 연결을 택한 Technical Services Program

E.A.T.의 핵심 사업인 Technical Services Program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운영됐다. Bell Laboratories와 IBM Labs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모집한 뒤, 기술 지원을 요청한 예술가와 일대일로 연결했다. Daniel Langlois Foundation의 기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원칙은 두 가지다. E.A.T.는 프로젝트의 디자인과 개발에 개입하지 않았고, 예술적 가치에 따라 요청을 심사하지 않았다.[2][3]

이 원칙의 취지는 엔지니어를 예술가의 지시만 수행하는 하청 인력으로 두는 데 있지 않았다. 연결 이후의 공동 작업을 중앙 조직이 미리 규정하지 않겠다는 선택에 가까웠다. 예술가는 완성된 기술 메뉴에서 효과를 고르는 대신 자신의 프로젝트에 필요한 동작을 설명해야 했고, 엔지니어는 이미 정해진 제품 사양이 아니라 낯선 예술적 요구를 기술 문제로 다시 구성해야 했다. 둘 사이의 번역은 결과보다 먼저 시작되는 제작이었다.

다만 ‘심사하지 않는다’는 원칙만으로 접근의 불평등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연구소의 장비를 쓸 수 있는지, 누가 협업 시간을 승인하는지, 실패 비용을 누가 감당하는지는 여전히 산업과 기관의 권한에 달려 있었다. 열린 연결망도 자원과 장소, 전문 언어에 대한 접근이 다르면 기울어진다. E.A.T.의 역사에서 배울 점은 협업을 선의로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그 제도의 한계를 함께 보는 데 있다.

《9 Evenings》에서 Pepsi Pavilion까지

《9 Evenings》은 E.A.T.가 어떤 종류의 중개를 하려 했는지 압축해서 보여 준다. 1965년 Klüver는 Rauschenberg의 도움을 받아 Bell Laboratories 엔지니어들에게 참여를 요청했다. 예술가 10명은 각자 공연을 만들었고, 엔지니어들은 무대에서 필요한 기술 요소를 함께 제작했다. 원래 스톡홀름의 예술·기술 축제에서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미국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장소를 뉴욕으로 옮겼고, 1966년 10월 13일부터 23일까지 Armory에서 열렸다.[1]

이후 E.A.T.는 짝을 연결하는 서비스를 넘어 대규모 환경을 직접 조정했다. 1970년 Osaka Expo의 Pepsi-Cola Pavilion에는 유럽·일본·미국의 예술가들과 63명의 엔지니어·과학자가 참여했다. 내부에는 지름 90피트의 210도 구면 거울이 설치되어 관객의 실상이 머리 위 공간에 떠 보였고, 바닥의 서로 다른 재료와 연결된 소리를 휴대용 수화기로 들을 수 있었다. 건물 외부와 내부의 장치, 음향, 퍼포먼스가 하나의 환경으로 묶였다.[4]

Pavilion의 규모는 기업 후원과 국제 박람회의 자원이 예술적 실험을 어디까지 키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규모가 커질수록 협업은 더 복잡해진다. 건축, 안전, 일정, 전력, 음향, 관객 동선, 제작 권한이 작품의 형식에 직접 개입한다. 거대한 반사 돔만 남겨 보면 기술적 장관이지만, 실제 작업 단위는 수십 명의 판단과 장치, 공간, 운영 규칙이 맞물린 시스템이었다.

E.A.T.는 1969년 Brooklyn Museum에서 열린 《Some More Beginnings》에도 140건의 예술가·엔지니어 제안을 모았다.[5] 이 기록은 협업이 한 명의 작가와 한 명의 기술자를 연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전시, 공모, 뉴스레터, 장비 대여, 포럼, 국제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디어가 사람과 기관, 기술 자원 사이를 이동하는 경로를 만들었다.

오늘의 미디어아트에서 협업을 어떻게 볼까

지금은 센서와 마이크로컨트롤러를 쉽게 구하고, 오픈소스 코드와 온라인 문서로 장치를 빠르게 시험할 수 있다.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더해지면서 예술가가 혼자 다룰 수 있는 기술의 범위도 넓어졌다. 그러나 협업 인프라의 필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접근해야 할 대상이 Bell Laboratories의 장비실에서 API 권한, 데이터 라이선스, 모델 정책, 네트워크 운영과 보안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미디어아트 프로젝트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라는 문장은 쉽게 쓰인다. 실제 협업은 역할표보다 결정 구조에서 드러난다. 누가 처음 문제를 정의했는지, 기술적 제약이 작품의 질문을 바꿀 때 누가 수정 권한을 갖는지, 실패와 보류가 기록되는지, 엔지니어와 설치·운영 인력이 저자로 인정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협업자가 많다는 사실과 공동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은 같지 않다.

E.A.T.의 Technical Services Program은 오늘 그대로 복제할 제도가 아니다. 산업 연구소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 기업 후원이 정한 규모와 방향, 기록에 남은 이름과 보이지 않는 노동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조직이 던진 질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새로운 기술을 예술가에게 소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이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번역과 책임의 구조를 함께 마련해야 하는가.

기술을 작품 바깥에서 주문하는 효과로, 협업을 완성 뒤에 붙이는 크레디트 목록으로만 다뤄서는 안 된다. E.A.T.가 만든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장치 하나가 아니라 낯선 요구를 함께 다룰 수 있게 한 접속 구조였다. 미디어아트에서 기술의 가능성을 묻기 전에, 그 가능성을 누가 누구와 어떤 조건에서 시험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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