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죽은 사람의 길을 어디까지 되살리는가
김희천의 《바벨》과 《Deep in the Forking Tanks》를 통해 GPS 기록과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상실 이후의 기억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 살펴본다.

이 이미지는 작품 기록이 아니라 글의 주제를 위해 생성한 개념적 삽화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휴대전화의 위치 기록은 남는다.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에는 출발점과 속도, 멈춘 장소가 저장되고 지도에는 이동 경로가 선으로 그어진다. 그 선을 따라가면 사라진 사람에게 조금 가까워질까. 어쩌면 인터페이스가 읽을 수 있는 좌표만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희천의 영상 《바벨》(2015)은 아주 개인적인 상실에서 이 질문을 꺼낸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설명에 따르면 작품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작가의 아버지가 남긴 GPS 데이터와 스포츠 애플리케이션 기록을 추적한다. 한강변, 잠실, 롯데월드, 지하철 같은 서울의 장소는 3D 그래픽과 구글맵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이 화면은 과거를 복원하는 투명한 창이 아니다. 데이터로 저장된 과거와 계속 변하는 현재가 서로 어긋나는 자리다.
경로는 남지만 걷기는 사라진다
GPS 경로에는 분명 사실이 들어 있다. 어느 시간에 어느 지점을 통과했는지,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그 사실은 한 사람의 경험과 같지 않다. 지도 위 선은 바람의 온도나 몸의 피로, 잠깐 떠올린 생각을 기록하지 않는다. 《바벨》이 되살리는 것은 아버지의 하루 전체가 아니라 기계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동의 일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애도는 데이터를 믿느냐 의심하느냐의 선택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기록은 실제 흔적이면서 큰 결손이기도 하다. 김희천은 그 결손을 감추지 않고 3D 이미지, 지도, 편지 형식의 서사 사이에 남겨 둔다. 관객은 좌표가 제공하는 확실성과 그 좌표로는 닿을 수 없는 관계를 한 화면에서 보게 된다.
인터페이스는 여기서 단순한 도구로 머물지 않는다. 지도는 복잡한 도시를 이동 가능한 표면으로 바꾸고, 운동 애플리케이션은 몸의 시간을 수치와 선으로 편집한다. 상실 이후 그 표면을 다시 열면 기억도 애플리케이션의 문법을 따라 배열된다. 화면의 형식은 무엇이 남았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지까지 정한다.
현실을 찍고 비현실의 층을 덧댄다
이 방식은 2019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의 동명 작품 《Deep in the Forking Tanks》에서 다른 감각으로 이어진다. 전시 설명은 김희천이 다이버들을 만나고 실제 잠수를 앞두고 감각 차단 탱크에서 모의 잠수를 경험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훈련이 계속되면서 시뮬레이션과 실제 잠수의 구분은 흐려진다. 탱크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없애면서, 역설적으로 그 경계를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프레임이 된다.
아트선재센터는 작가가 실제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한 뒤 GPS, VR, 얼굴 교환, 게임 같은 디지털 기술을 영상에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현실을 지우고 가상으로 대체하는 작업은 아니다. 실제 기록 위에 서로 다른 인식의 층이 포개진다. 관객은 무엇이 원본인지 맞히기보다 자신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어떤 장치 안에서 만들어지는지 살피게 된다.
Serpentine의 인터뷰 소개는 김희천이 새로운 장치와 도구가 인간의 인지를 바꾸는 과정에 관심을 둔다고 설명한다. 그의 영상에서 기술은 먼 미래를 장식하는 소품이 아니다. GPS, VR, 얼굴 교환은 이미 일상에 들어온 인터페이스다. 작품은 이 익숙한 장치들이 기억과 몸의 경계를 어디에 다시 긋는지 시험한다.
데이터가 관계를 대신하지 못하는 자리
《바벨》을 오늘 다시 보면 위치 기록은 더 이상 특별한 자료가 아니다. 우리는 사진의 촬영 위치, 이동 기록, 검색 이력, 생체 정보 같은 흔적을 매일 남긴다. 생성형 시스템은 이 자료를 묶어 그럴듯한 서사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기록이 많아질수록 한 사람을 더 정확히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커진다.
김희천의 작업은 정확한 좌표와 살아 있는 관계 사이의 간격을 그대로 둔다. 데이터는 사라진 사람의 경로를 다시 보여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길을 걸으며 보낸 시간을 돌려주지는 못한다. 화면에 나타난 선은 증거인 동시에 부재의 윤곽이다. 인터페이스가 매끄러울수록 이 차이는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디지털 기억은 기록의 양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어떤 장치가 무엇을 선택해 보이게 하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데이터로 다시 만든 기억이 관계의 빈자리를 솔직하게 남기는지, 아니면 복원이라는 말로 덮어 버리는지도 구분해야 한다.
김희천의 화면은 죽은 사람을 데이터로 되살릴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기계가 남긴 경로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이 정확하면서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애도는 그 부족함을 기술로 없애는 일이 아닐 것이다. 선명한 좌표와 돌아오지 않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끝까지 보는 일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