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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10.18

화면 속 나와 관객의 거리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비디오 비평을 비토 아콘치와 조앤 조너스의 작품에 비추어 읽으며, 자기 모습을 돌려주는 화면이 관객을 붙잡거나 비판적 거리를 만드는 방식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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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케이블의 열린 고리 안에서 타원형 물체와 그 영상을 마주 놓은 개념 이미지

GPT Image 2로 생성한 개념 이미지. 실제 작품이나 전시를 재현한 사진이 아니다.

화면에 내 모습이 나타나면 시선은 쉽게 붙잡힌다. 손을 움직여 보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화면 속 형상이 얼마나 정확하게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그러나 내가 화면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이 크게 보이는 일과, 내가 작품의 관계를 바꾸는 일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를 살필 때 미술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오래된 질문이 다시 유용해진다. 그는 1976년 《October》 창간호에 발표한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에서 비디오의 즉각적인 자기 반영을 나르시시즘과 연결했다.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에 놓인 몸이 자신의 이미지를 곧바로 돌려받는 구조를 문제 삼은 것이다. 논문 서지와 원문, 50–52쪽

그 질문을 오늘의 전시에 가져올 때 필요한 것은 관객의 성격을 진단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보게 하는지, 그 배치가 자기 모습에 머물게 하는지 아니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조건을 보게 하는지 살피는 일이다. 이 글은 두 초기 비디오 작품을 통해 그 차이를 읽고, 이를 현재의 화면 설계에 적용해 본다.

거울처럼 돌아오는 이미지가 만드는 관계

크라우스가 주목한 비디오의 특성은 촬영과 전달을 동시에 수행하며 피드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수행자의 몸은 카메라에 잡히고, 그 이미지는 모니터에 나타나 다시 수행자에게 돌아간다. 논문의 나르시시즘은 이때 생기는 심리적 폐쇄를 가리킨다. 장치를 물질적 구성만으로 정의하는 대신, 장치가 자아와 맺는 관계를 매체의 문제로 제시한 셈이다. 크라우스, 52쪽

여기서 출발해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간단하다. 화면을 보는 동안 내 관심은 어디로 향하는가. 내 얼굴이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 데 몰두하는가, 아니면 내가 보고 있는 형상이 어떤 선택과 배치의 결과인지 알아차리는가. 같은 카메라와 같은 화면으로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가령 전시장 한쪽에 카메라와 화면을 놓는다고 상상해 보자. 관객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더 크게 보이도록 구성할 수 있다. 반대로 가까이 다가가면 자기 모습을 보기 어려워지고, 옆으로 비켜서야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는 특정 작품의 기록이 아니라 관계를 비교하기 위한 가정이다. 두 배치의 장비 목록이 같더라도, 관객이 찾게 되는 자리와 타인에게 내주는 자리는 달라진다.

화면의 반응 속도나 선명도만으로는 참여의 성격을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잘 보인다는 만족,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 긴장, 내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불편함은 서로 다른 감각이다. 작품을 읽는 일은 이 차이를 장치의 배치와 연결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아콘치의 손가락은 누구를 향하는가

비토 아콘치의 《Centers》(1971)는 22분 28초 길이의 흑백 유성 비디오다. 아콘치는 카메라를 향해 팔을 뻗고, 모니터에 나타난 자기 이미지의 중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려 한다. 시간이 흐르며 지친 몸 때문에 손가락의 위치가 조금씩 조정된다. EAI의 작품 기록은 그가 자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객을 정면으로 가리키게 된다고 설명한다. EAI 작품 기록

크라우스는 논문의 첫머리에서 이 작업을 모니터를 거울처럼 사용하는 사례로 읽는다. 시선이 자신의 영상으로 돌아오는 구조에서 비디오의 자기 몰입을 포착한다. 크라우스, 50쪽

흥미로운 것은 EAI가 함께 실은 작가의 설명이다. 아콘치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화면의 결과를 통해 바깥의 관객을 향하는 행위로 바뀐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자기 이미지와 관객의 자리가 겹치는 장면을 강조한다. EAI에 수록된 작가의 설명

두 설명을 나란히 놓으면 한쪽을 정답으로 고르는 대신 더 구체적인 질문을 얻는다. 화면 속 수행자가 바라보는 대상과, 화면 앞 관객이 자신에게 향한다고 느끼는 대상이 같은가. 수행자는 자기 이미지를 조정하고 있지만 관객은 지목당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나의 동작이 양쪽에서 다른 관계를 만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차이는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에도 질문을 남긴다. 화면을 혼자 마주 보는 자리와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나는 자리에서는 같은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달라진다. 화면의 크기와 높이, 서 있을 수 있는 거리도 관객의 자세에 관여한다. 이것은 이 작품의 설치 조건을 임의로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다. 작품을 설명할 때 영상에 기록된 행위와 그 행위를 마주하는 관람 조건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조너스는 매끄러운 거울을 흔든다

조앤 조너스의 《Vertical Roll》(1972)은 19분 38초의 흑백 유성 비디오다. 화면은 수직으로 반복해서 흘러가고, 수평의 검은 띠가 신체 이미지를 끊는다. EAI는 조너스가 전자 신호의 교란을 형식적 장치로 사용해 신체의 재현과 비디오 기술을 함께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반복되는 날카로운 타격음도 이 시각적 리듬을 강화한다. EAI 작품 기록

이 설명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으면, 몸을 보여 주는 화면은 몸을 안정적으로 소유하게 해 주는 거울이 되지 않는다. 온전한 형상을 붙잡으려는 시선은 계속 끊기고 다시 연결된다. 무엇이 화면에 등장하는가뿐 아니라 화면이 어떻게 형상을 유지하거나 흩트리는가가 감상의 문제가 된다. 이는 EAI가 기록한 장치와 형식에서 이 글이 도출하는 해석이다.

크라우스 자신도 비디오 전체를 하나의 결론으로 닫지는 않았다. 논문의 후반부에서 자기 폐쇄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작품들을 구분하며 《Vertical Roll》을 다룬다. 신호의 불안정과 시간의 진행을 논하는 대목은 그의 글을 단순한 비디오 비난으로 읽기 어렵게 한다. 크라우스, 59–61쪽

오늘의 제작자가 여기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화면에 오류를 추가하라는 처방이 아니다. 관객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과, 그 자신을 보이게 하는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다. 화면을 흔들거나 지연시키는 효과도 그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눈에 띄는 장식에 머물 수 있다. 반대로 작은 배치의 변화가 누가 누구를 볼 수 있는지를 바꾼다면, 시각적 효과가 적더라도 감상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

관객이 자기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있는가

이 논의를 지금의 반응형 전시에 적용할 때는 과거의 비디오와 오늘의 시스템을 구분해야 한다. 카메라의 영상을 바로 돌려주는 구성과, 입력을 계산해 다른 형상으로 변환하는 구성은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아래의 질문은 크라우스가 현재의 기술을 분석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 이 글의 제안이다.

먼저 관객이 무엇을 확인하게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손을 움직여 화면이 따라오는지 알아보는 것만으로 경험이 끝나는가. 움직인 결과가 다음 사람에게 남거나, 다른 사람의 선택을 만나거나, 처음 예상한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가. 반응이 풍부하다는 사실과 관계가 풍부하다는 판단은 따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었을 때 남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자기 형상을 보고 있을 때만 성립하는 작업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다만 그 순간의 강렬함이 작품의 전부인지, 공간과 타인에 대한 감각으로 이어지는지에 따라 작품을 설명하는 말은 달라져야 한다. 관객이 오래 머물렀다는 수치만으로 어느 쪽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다.

제작 과정에서는 같은 입력을 두 가지 배치로 시험해 볼 만하다. 한 배치에서는 자기 모습을 정면으로 크게 보여 주고, 다른 배치에서는 옆 사람과 화면을 나누어 보게 한다. 비교할 것은 어느 쪽이 더 화려한가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 서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며, 언제 화면 밖을 바라보는지 관찰하면 관계의 차이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 비교는 특정한 반응을 보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제작자의 예상과 실제 관람 사이를 확인하는 작은 실험이다.

크라우스의 질문을 지금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 모습을 돌려주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이미지를 보는 사람이자 이미지의 재료가 된다. 좋은 비평은 그 겹침을 곧바로 참여나 소외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관객이 어떤 자리를 얻고, 어떤 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 끝까지 살핀다.


참고: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October》 1, 1976, 50–64쪽. 논문 정보, 원문 스캔. 작품의 연도·길이·매체·행위는 위에 연결한 EAI 기록을 따랐다. 전시 설계에 관한 가정과 제안은 이 글의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