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는 기술의 이름이 아니다
A first-person essay on why media art depends on artistic inquiry and the necessity of its medium, examined through Hideo Iwasaki's bioart and the choices facing artists in the AI era.

요즘 미디어아트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AI로 만든 이미지나 영상부터 떠올린다. 전시장에는 거대한 LED 화면이 놓인다. 생성형 이미지는 음악에 맞춰 끊임없이 변하고, 실시간과 몰입형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작품 소개는 어떤 모델과 엔진을 썼는지부터 밝힌다. 기술은 놀랍고 화면은 화려하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로 만든 시청각 결과물을 모두 미디어아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글은 미디어아트의 자격을 가르는 보편적 정의를 세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지금 내가 작품을 보고 만들며 놓치지 않으려는 질문을 기록한 글에 가깝다. 새로운 장비와 이미지가 주는 쾌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술적 성취와 예술적 질문을 같은 말로 덮지 않기 위해 필요한 구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화려한 화면과 미디어아트는 같은 말이 아니다
잘 만든 영상과 정교한 디자인, 압도적인 스케일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에는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영상편집은 이미지와 소리와 시간을 조직하는 강력한 제작 기술이다. 디자인은 목적에 맞춰 정보와 경험을 설계하는 전문적인 실천이다. 둘 다 높은 수준의 감각과 판단을 요구하며 사람을 깊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이 가치를 미디어아트인지 여부와 별개의 문제로 보고 싶다. 보기 좋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는 결과물의 성격까지 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려함은 작품의 한 특성일 뿐 예술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큰 스크린과 높은 해상도, 실시간 반응, 최신 AI 모델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기술이 단순하고 장비가 낡았다고 해서 미디어아트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매체의 조건이 작품의 형식과 의미를 실제로 만든다면, 오래된 장치와 작은 신호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작업이 성립할 수 있다.
미디어아트는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비디오아트와 사운드아트, 전자신호와 폐쇄회로, 피드백과 시간 지연, 기계장치와 키네틱 구조, 퍼포먼스와 관객 참여, 네트워크와 데이터, 로봇과 생명공학까지 그 계보는 넓고 오래됐다. 디지털 기술을 전혀 쓰지 않는 작업도 있고 화면조차 필요하지 않은 작업도 있다. AI 아트는 이 긴 역사에 최근 합류한 한 갈래일 뿐, 미디어아트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은 아니다.
그래서 편집이나 디지털 디자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결과물이 곧바로 미디어아트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영상, 디자인, 상업적 목적을 가진 콘텐츠를 미디어아트보다 낮은 것으로 볼 이유도 없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창작은 각자의 언어와 판단 기준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구분하려는 것은 위계가 아니라, 한 작업에서 기술과 형식이 어떤 질문을 맡고 있는가이다.
살아 있는 것이 매체가 될 때
미디어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는 바이오아트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미디어라고 하면 흔히 화면과 카메라, 프로젝터와 컴퓨터부터 떠올린다. 바이오아트에서는 살아 있는 세포와 미생물, 배양 과정과 생물학적 시간까지 작품의 매체가 된다. 생물학에서 미생물을 기르는 배지인 culture medium이 예술에서 말하는 medium과 문자 그대로 겹치는 셈이다. 완성된 이미지를 재생하는 대신 살아 있는 존재가 성장하고 이동하고 쇠퇴하는 과정 자체를 형식과 시간으로 삼는다.
일본의 생명과학 연구자이자 작가 히데오 이와사키(Hideo Iwasaki)의 《Culturing <Paper>cut》(2013–)은 그 의외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NTT ICC의 작품 기록에 따르면, 이 작업의 재료가 되는 종이는 이와사키가 시아노박테리아의 형태 형성과 생체시계를 연구해 쓴 논문이다. 연구자의 능동적 행위나 1인칭이 드러나는 문장은 오려내고, 생물학 논문의 시각 문화를 이루는 도표와 그래프는 남긴다. 그렇게 오려낸 논문을 배지에 놓고 시아노박테리아를 배양하면 박테리아가 천천히 성장하고 움직이며 복잡하고 완전히 예측하기 어려운 무늬를 만든다.
여기까지가 공식 작품 기록에서 확인되는 재료와 절차다. 그다음은 내가 이 작업을 읽는 방식이다. 과학이 분석하고 설명하던 대상이 논문 위로 되돌아와, 연구자의 말이 빠져나간 자리를 자신의 움직임으로 채우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적 표상인 도표, 공예적 행위인 종이 오리기, 비인간 생명체가 만드는 생성적 패턴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시아노박테리아의 패턴 형성은 생물학 연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표현 매체가 된다. 살아 있는 재료가 단순히 신기한 볼거리가 아니라, 과학의 객관성과 연구자의 주관, 인간과 비인간의 표현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묻게 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aPrayer: まだ見ぬ つくられしものたちの慰霊》(2016)은 생명의 성장에서 죽음과 애도의 문제로 질문을 넓힌다. 제목은 우리말로 ‘아직 보지 못한, 만들어진 존재들을 위한 위령’에 가깝다. 와세다대학교의 공식 기록은 이와사키와 연구팀이 인공세포 연구, 지역의 발효·양조 문화, 전통적인 위령의 형식을 연결한 학제적 프로젝트로 이 작업을 소개한다. 전시는 인공세포와 미생물, 발효 생산에 관련된 표본과 연구 도구를 둔 가상의 위령 공간, 연구자와 지역 생산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 인공세포·인공생명과 미생물을 위한 석비로 구성됐다.
공식 기록은 ‘위령’이라는 보조선을 그어 과학적 생명상과 일상에서 느끼는 생명관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 구성 앞에서 더 나아간 질문을 떠올린다. 아직 완전한 생명인지조차 합의되지 않은 인공세포가 죽을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든 생명을 애도할 수 있는가. 생명을 만들고 사용하는 연구자에게는 어떤 책임과 감정이 생기는가. 이것은 작품 설명을 사실처럼 확장한 결론이 아니라, 위령 공간과 인터뷰와 석비가 내게 열어 보인 해석의 방향이다.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미디어아트가 전자기술이나 디지털 이미지에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여기서 매체는 박테리아와 배지, 과학 논문과 실험 절차, 생물학적 시간과 우연성, 위령과 돌봄 같은 사회적 의례까지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재료의 희소성이나 기이함이 아니다. 그 재료로 무엇을 묻고, 그 질문이 작품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기술이 작품의 필연이 되는가
내가 어떤 작업을 아트라고 부를 때 기대하는 최소한의 근거는 작가 자신의 생각과 문제의식이 작품에 담겨 있는가이다. 여기서 생각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뚜렷한 메시지만 뜻하지 않는다. 무엇을 바라보고 의심하는지, 어떤 관계를 만들거나 거부하려는지,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했는지까지 포함한다. 공동 작업에서는 한 사람의 천재성보다 함께 세운 질문과 판단의 구조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작품의 결정이 우연한 기술 효과나 유행의 모방으로만 남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생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생각이 작가노트에만 적혀 있고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직 작품의 언어가 되지 못했다. 왜 이 매체를 골랐는지, 무엇을 질문하는지, 관객에게 어떤 감각과 경험을 건네려는지는 작품 안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와 소리, 공간과 시간, 관객과 맺는 관계가 그 생각을 실제로 움직여야 한다. 긴 설명을 읽은 뒤에야 의미가 생겨서는 곤란하다. 작품을 보고 듣고 통과하는 경험 안에서 생각의 일부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미디어아트를 볼 때 “무슨 기술을 썼는가”보다 “왜 이 기술이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사용한 기술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실시간 입력을 고정된 영상으로 대체하고, 인터랙션까지 제거했는데도 작품의 핵심이 그대로라면 그 기술은 제작이나 전시를 돕는 수단에 가까울 수 있다. 반대로 특정한 화면과 신호, 코드와 네트워크, 공간과 관객의 행동을 제거했을 때 작품의 의미와 경험이 달라진다면 그 매체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기계적인 판정표로 쓸 수는 없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어떤 기술은 운송 수단처럼 기능하고, 다른 기술은 의미의 뼈대가 된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나 우연이 작업의 중심을 바꾸기도 한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특정 매체에 충실한가라는 형식적 순도만이 아니다. 작가가 매체를 얼마나 필연적인 형식으로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 그 매체가 없으면 질문과 경험도 달라지는가이다.
이와사키의 작업이 내게 강하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논문을 단순히 이미지로 인쇄하거나 박테리아를 장식처럼 전시했다면 같은 질문이 생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려낸 논문의 빈자리에서 연구 대상이었던 생명체가 자라고, 위령이라는 오래된 형식 안에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생명을 놓았기 때문에 과학적 표상과 생명, 객관성과 관계, 제작과 책임의 긴장이 구체적인 경험이 된다. 재료와 절차가 생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을 발생시킨다.
AI 시대, 작가의 판단은 어디에 있는가
AI 시대에는 이 질문이 더 선명해진다. 이미지를 생성했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생성하지 않기로 했는지, 수많은 결과 가운데 무엇을 고르고 버렸는지, 어떤 순서와 크기와 시간으로 배치했는지가 작가의 판단을 드러낸다. 프롬프트와 모델 이름은 제작 정보를 말해 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작업의 문제의식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빠르고 화려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은 출발점일 수 있어도 작품의 결론은 아니다.
모든 AI 작업이 데이터와 모델의 편향, 창작 노동, 저작권, 플랫폼 의존성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작가는 자신이 쓰는 시스템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감추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생성 과정의 조건이 작품 안에서 중요한지, 아니면 결과물의 표면만 소비하고 있는지에 따라 AI의 역할은 달라진다. 후자라면 AI는 작품의 매체라기보다 손쉬운 효과에 머물기 쉽다.
물론 나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새 기술이 주는 흥분과 빠르게 얻은 결과물의 완성도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내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뒤로 미룰 수 있다. 그럴듯한 형식이 생겼다는 이유로 작업이 이미 작품이 되었다고 착각할 위험도 늘 곁에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은 다른 작업을 가르는 잣대이기 전에 내 작업을 되묻는 질문이어야 한다. 나는 왜 이 매체를 택했는가. 이 기술이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 생각과 경험이 정말 작품 안에 있는가.
이 구분의 목적은 미디어아트의 자격을 심사하거나 장르의 문을 좁히는 데 있지 않다. 영상과 디자인, 상업적 목적을 가진 콘텐츠도 각자의 방식으로 훌륭하며 사람을 깊이 움직인다. 미디어아트라는 이름이 다른 창작보다 높은 지위를 뜻하지도 않는다. 다만 모든 디지털 결과물에 같은 이름을 붙이면 서로 다른 목적과 판단 기준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진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뿐 아니라 왜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는지 묻는 일은 배제가 아니라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구분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미디어아트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보고 듣고 기억하고 관계 맺는 방식을 만드는 매체를 예술의 재료이자 질문으로 삼는 일이다. 기술은 작품의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작품까지 대신 완성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생각과 문제의식이 매체와 형식 속에서 작동해 관객의 감각이나 인식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 그 작업을 아트라고 부를 최소한의 근거가 생긴다. 미디어아트의 핵심은 새로움이나 화려함보다 매체를 대하는 작가의 사유와 태도에 있다.
출처와 참고
- NTT InterCommunication Center [ICC], Hideo Iwasaki, 《Culturing <Paper>cut》: https://www.ntticc.or.jp/ja/archive/works/culturing-paper-cut/
- Hideo Iwasaki의 작가 저술: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3528165.2020.1807763
- Waseda University, 《aPrayer: まだ見ぬ つくられしものたちの慰霊》 프로젝트 기록: https://www.waseda.jp/top/news/44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