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레는 무늬 사이에서 움직인다
겹친 선 사이에 생기는 모아레는 어디에 있는 이미지일까. 헤수스 라파엘 소토의 투명한 작품과 무늬의 중첩을 통해 관객의 위치가 이미지에 참여하는 방식을 살펴봅니다.

표지는 글의 주제를 표현한 AI 생성 개념 이미지입니다. 소토의 실제 작품이나 모아레 실험 결과를 재현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촘촘한 울타리 너머에 또 다른 울타리가 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철망의 작은 칸들 사이로, 어느 울타리에도 따로 그려져 있지 않은 넓은 띠가 보이기도 한다. 옆으로 이동하면 그 띠가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 각각의 철망을 살펴보아도 큰 물결의 윤곽은 찾기 어렵다. 물결은 두 무늬를 함께 보는 관계 안에서 나타난다.
이런 현상을 모아레(moiré)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스코의 과학관 Exploratorium은 반복 무늬를 가진 반투명 물체들이 겹칠 때 나타나는 밝고 어두운 패턴으로 이를 설명한다. 작은 어긋남이 훨씬 큰 무늬의 차이로 드러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Exploratorium의 모아레 설명
미술에서는 이 효과가 보는 사람의 위치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앞에 놓인 선들이 그대로인데도 관객의 이동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진다면, 작품은 어디까지 완성되어 있는 것일까.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ús Rafael Soto)의 투명한 구조물들은 이 질문을 구체화한다. 움직임을 담은 그림과, 보는 동안 움직임이 생기는 그림 사이의 차이다.
어느 판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무늬
모아레를 이해할 때 먼저 구분할 것은 원래의 무늬와 겹쳐 보이는 무늬다. 앞쪽의 검은 선이 뒤쪽의 투명한 틈을 가리면 어두운 영역이 커진다. 반대로 두 검은 선이 포개져 그 옆의 틈이 함께 드러나면 밝은 영역이 생긴다. 이 밝고 어두운 영역들이 모여, 각각의 판에 있던 촘촘한 선과 다른 크기의 무늬를 만든다. Exploratorium이 설명하는 겹침의 원리다. 원리와 관찰 활동
그 큰 무늬를 새로 그려 넣은 물체는 없다. 그렇다고 무엇을 보든 마음대로 그렇게 느끼는 현상인 것도 아니다. 두 패턴의 간격과 방향, 겹치는 정도가 결과를 제한한다. 모아레의 흥미는 없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는 데 있기보다, 실제로 놓인 요소들의 관계에서 각 요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데 있다.
같은 자료는 빗 두 개를 포개거나 두 겹의 방충망을 바라보며 한쪽을 밀고 돌려 보는 방법을 제안한다. 움직이는 것은 한 겹의 작은 위치이지만, 관찰되는 것은 넓은 띠의 변화다. 이때 작은 차이가 눈에 잘 띄는 크기로 드러난다. 단순한 재료가 복잡한 이미지처럼 보이는 이유를 새로운 선을 계속 추가하는 과정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이미 있는 선들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간섭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투명한 판의 검은 선이 틈을 가리는 설명과, 빛의 파동이 서로 상쇄되는 설명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다. Exploratorium은 모아레 무늬를 파동 간섭을 설명하는 모형으로도 활용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투명한 판의 예는 먼저 가림과 겹침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과학 용어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광학 효과를 한 원리로 뭉뚱그릴 이유는 없다.
소토의 투명한 판에는 보는 자리가 들어 있다
MoMA가 소개하는 소토의 《Double Transparency》(1956)는 두 장의 플렉시글라스에 줄무늬를 그리고 일부를 겹쳐 놓은 작업이다. 미술관은 관객이 앞에서 움직일 때 구성이 깜박이는 듯 보인다고 설명한다. 재료 목록에는 플렉시글라스와 나무에 그린 유화, 금속 막대와 볼트가 함께 적혀 있다. 투명한 그림의 효과는 실제로 판들을 배치하고 지지하는 구조 위에 놓인다. MoMA 작품 기록
이 구조를 평평한 그림 한 장으로만 생각하면 투명함의 역할을 놓치기 쉽다. 앞의 표면을 통해 뒤의 표면이 보이고, 두 표면은 한눈에 함께 들어온다. 관객이 자리를 옮기면 떨어져 있는 무늬들의 시각적 관계도 바뀐다. 작품 앞의 공간은 이미 완성된 이미지를 편하게 감상하기 위한 여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이 겹쳐 보이는지 결정하는 조건이 된다.
이런 변화는 관객에게 정해진 동선을 따라야 한다는 명령과도 다르다. MoMA의 설명에서 확인되는 것은 이동에 따른 깜박임이지, 누구나 같은 속도로 같은 순서를 경험한다는 규칙이 아니다. 어느 위치에서 멈추고 얼마만큼 옆으로 옮겨 보는지에 따라 비교하는 장면이 달라질 수 있다. 작품에 참여한다는 말은 여기서 버튼을 누르거나 별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한다는 뜻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미술관은 이 광학적 효과를 소토가 비물질적이고 영속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이 말이 나무와 볼트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안정된 지지 구조가 있어야 불안정해 보이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물체가 존재하는 방식과 그것이 보이는 방식 사이의 차이를 작품이 드러낸다고 읽을 수 있다. 이는 미술관의 설명을 토대로 한 해석이며, 물질이 실제로 사라진다는 주장은 아니다.
모터 없이 생기는 움직임
켐퍼 미술관의 《Spirale》(1955/1959) 설명은 관객의 역할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앞쪽 플렉시글라스에는 흰 나선이 인쇄되어 있고, 간격을 두고 놓인 뒤쪽 지지체에는 검은 나선이 있다. 관객이 작품 앞에서 움직이면 두 나선이 시각적으로 교차하면서 모아레에 의한 운동의 착시가 생긴다고 한다. 두 나선의 배치와 관찰자의 이동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켐퍼 미술관 작품 해설
같은 해설은 이 작업이 부분적으로 마르셀 뒤샹의 《Rotoreliefs》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뒤샹의 기계적으로 회전하는 원판에 관심을 가졌지만, 소토는 모터 없이 비슷한 일을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작품의 작동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참고한 움직임의 문제를, 소토는 관객의 이동과 투명한 층의 관계로 옮겨 놓았다.
따라서 움직이는 작품인지 묻는 질문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말이 필요하다. 물체의 부품이 회전하는지, 표면에 투사된 영상이 시간에 따라 바뀌는지, 관객이 움직이며 겹침을 다르게 보게 되는지는 서로 다른 상황이다. 모두 움직임을 경험하게 할 수 있지만,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장소가 같지는 않다. 모아레 작품은 그 장소를 하나의 물체 안에서만 찾기 어렵게 한다.
이 차이는 미디어아트를 기술 목록으로 구분할 때 생기는 한계도 보여 준다. 센서나 프로그램이 없어도 관객의 위치가 이미지의 구성에 관여할 수 있다. 반대로 센서가 달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관객의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질문은 어떤 장치가 있다는 확인 다음에 온다. 그 장치와 공간, 관객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는지를 묻는 일이다.
모아레가 보인다고 모든 관객에게 동일한 움직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높이와 거리, 옆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달라지면 경험의 조건도 달라진다. 여기서 접근성은 작품 바깥의 편의 문제로만 남지 않는다. 관객의 이동이 작품의 작동에 관여한다면, 누가 어떤 위치에서 그 변화를 볼 수 있는지도 전시를 구성할 때 살펴야 한다. 이는 특정 미술관의 설치 상태를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 해당 작동 방식에서 따라 나오는 질문이다.
사진 한 장이 남기는 것과 놓치는 것
모아레 작품의 사진은 한 위치에서 성립한 겹침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진만으로는 관객이 옆으로 이동했을 때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알기 어렵다. 이미지의 어느 부분이 판에 고정된 무늬이고 어느 부분이 두 층의 관계에서 생긴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정지사진은 작품의 한 상태를 전달하지만, 그 상태가 바뀌는 조건 전체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가 이동하며 보여 준 변화는 카메라가 선택한 경로의 기록이다. 관객이 현장에서 스스로 멈추고 다시 움직이며 비교하는 일과는 다르다. 따라서 기록을 읽을 때는 효과가 얼마나 강렬한지와 함께 무엇이 움직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판인지, 관찰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를 알아야 보이는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모아레를 사용하는 제작에서도 같은 질문이 유효하다. 선을 더 촘촘히 만들고 효과를 더 강하게 만드는 일만이 목표일 필요는 없다. 작은 이동이 어떤 차이를 드러내는지, 관객이 그 차이를 비교할 시간을 얻는지, 한 자리에서만 선명한 효과가 경험의 전부가 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런 판단은 특정 장비의 권장값을 찾는 일보다 작품이 어떤 보기의 관계를 만들려 하는지 정하는 일에 가깝다.
소토의 투명한 판 앞에서 이미지의 위치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선은 판 위에 있지만, 우리가 보는 큰 무늬와 움직임은 선들의 배치와 관객의 자리 사이에서 나타난다. 모아레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그 사이를 감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걸음 옮겨 볼 때 달라지는 것이 작품에 덧붙은 사소한 효과인지, 작품이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자체인지 살펴보면, 정지된 물체를 보는 시간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