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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2026년 6월 18일

물질은 화면 뒤에서 작동한다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미디어아트를 이미지나 메시지가 아니라 센서, 전력, 데이터, 신체, 환경이 함께 만드는 물질적 사건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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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과 미디어아트 커버

디지털 이미지는 자주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 위의 빛, 클라우드에 떠 있는 파일, AI가 순식간에 만들어 낸 이미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설치는 마치 순수한 정보와 경험만으로 이루어진 듯 말해진다. 그러나 전시장에 조금 오래 머물러 보면 다른 장면이 보인다. 프로젝터는 열을 내고, 센서는 특정 거리와 조명에서만 몸을 감지하며, 스피커의 진동은 벽과 바닥을 타고 이동한다. 서버는 어딘가에서 전기를 먹고, 데이터셋은 누군가의 기록과 노동을 지나 모델 안으로 압축된다.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바로 이 보이지 않게 처리된 층을 다시 앞으로 끌어낸다. 물질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기 전의 수동적 배경이 아니다. 신체, 장치, 데이터, 환경, 광물, 전력, 제도, 비인간 사물은 모두 현실이 형성되는 과정에 참여한다. 미디어아트에서 이 관점은 작품을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만으로 읽지 않게 만든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물질적 배치가 이 말하기와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가”가 된다.

작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배치다

미디어아트를 이미지나 메시지의 문제로만 읽으면 작품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같은 영상 파일이라도 CRT 모니터에서 재생될 때와 대형 LED 월에서 재생될 때는 다른 작품처럼 작동한다. 같은 코드라도 전시장 조도, 네트워크 지연, 센서 감도, 관객 밀도, 스피커 위치, 운영체제 버전에 따라 다른 경험을 만든다. 이 차이는 부수적 기술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실제 조건이다.

카렌 바라드가 말한 장치(apparatus)의 관점은 여기서 유용하다. 장치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무엇이 관객이고, 무엇이 입력이며, 무엇이 반응이고, 어디까지가 작품인지의 경계를 만드는 물질-담론적 배치다. 인터랙티브 설치에서 관객은 이미 완성된 자유로운 주체로 들어와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의 위치, 센서가 감지할 수 있는 몸, 안내 문구가 허용하는 움직임, 코드가 해석하는 데이터 범위 안에서 “참여자”로 구성된다.

이렇게 보면 작품의 의미는 화면 안에만 있지 않다. 케이블의 길이, 프로젝터의 밝기, 냉각팬의 소음, 데이터가 들어오는 API, 장비를 계속 작동시키는 스태프의 유지보수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신유물론은 이것들을 배경으로 밀어내지 말고, 작품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로 보자고 요구한다.

디지털은 비물질적이지 않다

디지털 문화가 가장 자주 반복하는 신화는 비물질성이다. 클라우드는 구름처럼 부드러운 이름을 갖지만 실제로는 데이터센터, 토지, 냉각수, 전력망, 광케이블, 반도체 공급망 위에 서 있다. AI 이미지는 화면에 즉시 나타나지만, 그 뒤에는 학습 데이터, 라벨링 노동, GPU, 서버 냉각, 플랫폼 정책, 필터링 규칙, 프롬프트 문화가 얽혀 있다. 결과물은 순수한 상상력이 아니라 물질-담론적 사건이다.

제인 베넷의 “활력 있는 물질”이라는 생각은 이 지점을 감각적으로 만든다. 전선, 금속, 먼지, 열, 배터리, 폐기물은 인간 의도를 기다리는 죽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작품의 지속 시간, 오류, 접근성, 비용, 감각 강도를 바꾼다. 프로젝터가 과열되면 전시는 중단되고, 센서가 어두운 피부나 휠체어의 이동을 잘못 읽으면 참여의 조건은 불평등해진다. 알고리즘 편향도 추상적 윤리 문제가 아니라 카메라, 조명, 데이터셋, 라벨 체계, 배포 환경이 함께 만든 물질적 효과다.

이 관점은 미디어아트의 생태적 질문도 바꾼다. 대형 몰입형 전시의 압도적 스펙터클은 LED 벽, 전력, 냉각, 장비 교체, 운송, 설치 노동을 필요로 한다. 생태적 비용은 작품 바깥의 별도 항목이 아니라 작품의 미학을 가능하게 하는 내부 조건이다. 신유물론은 “멋진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유지하는 물질적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

관객의 몸도 하나가 아니다

신유물론은 인간을 지우려는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말하지 않기 위한 관점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이라는 단어는 자주 단수형으로 쓰이지만, 실제 몸들은 서로 다르다. 키, 피부색, 이동 방식, 청각과 시각 조건, 감각 과민성, 언어 이해, 장애 여부, 기기 사용 습관은 작품 경험을 다르게 만든다.

인터랙티브 작품에서 이 차이는 특히 중요하다. 센서가 어떤 몸은 쉽게 감지하고 어떤 몸은 놓친다면, 그것은 관객의 개인적 실패가 아니다. 작품의 장치적 배치가 어떤 몸을 표준으로 삼았는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얼굴 인식 기반 작업, 생체 데이터 설치, 몰입형 사운드 환경, AI 관객 분석 시스템은 모두 “보편적 관객”이라는 말을 의심하게 만든다.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문화(natureculture)나 포스트휴먼 논의가 신유물론과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 몸과 기술, 감각과 데이터의 바깥에 서 있는 주인이 아니다. 관객의 몸은 전시장 공기, 센서, 안내문, 모델, 조명, 다른 관객의 움직임과 함께 구성된다. 참여는 순수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감지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며 제도적으로 허용된 몸의 사건이다.

AI 시대의 미디어아트가 다시 물질을 봐야 하는 이유

생성형 AI 이후 미디어아트는 다시 한 번 “비물질적 창작”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텍스트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오고, 프롬프트를 조절하면 스타일이 바뀌며, 모델은 인간 상상력을 확장하는 도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AI는 도구 하나가 아니라 거대한 장치다. 수집된 이미지와 문장, 저작권의 경계, 데이터센터, 모델 가중치, 필터, 플랫폼 요금제, 사용자 인터페이스, 결과물을 평가하는 문화적 취향이 함께 이미지를 만든다.

따라서 AI 미디어아트를 비평할 때도 질문은 “인간이 만들었는가, 기계가 만들었는가”에서 멈추면 부족하다. 어떤 데이터가 기억되고 어떤 데이터가 지워졌는가. 어떤 몸과 지역과 언어가 표준으로 학습되었는가. 어떤 인프라와 에너지 비용이 이미지의 매끄러움 뒤에 있는가. 어떤 플랫폼이 창작 가능성의 범위를 정하는가. 이런 질문이 작품의 형식 분석만큼 중요해진다.

신유물론은 미디어아트의 낭만을 없애는 대신 더 두껍게 만든다. 이미지는 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세계와 연결된다. 빛은 전력망과, 데이터는 노동과, 센서는 몸의 차이와, 전시는 생태적 비용과 함께 읽힌다.

끝내 남는 판단

좋은 미디어아트 비평은 작품의 화면을 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화면 뒤에서 무엇이 열을 내고 있는가. 어떤 장치가 관객을 특정한 몸으로 만들고 있는가. 어떤 데이터와 광물과 전력이 그 경험을 떠받치는가. 어떤 비인간 요소가 작품의 의미를 함께 만들고 있는가.

신유물론이 미디어아트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작품은 정말 화면 위에만 있는가. 아니면 화면 뒤에서 작동하는 물질들의 임시적 동맹이,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잠시 만들어 내고 있는가.


이 글은 DEXA vault의 New Materialism 노트를 바탕으로 공개 블로그용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주요 근거 표면은 Diana Coole and Samantha Frost의 New Materialisms, Karen Barad의 agential realism, Jane Bennett의 vibrant materialism, Donna Haraway의 natureculture, 그리고 디지털 물질성·인프라·AI 장치 분석 관련 내부 앵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