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ck to Blog
Article · 2026.07.09

네트워크는 어떻게 공동 저자가 되는가

로이 애스콧의 사이버네틱 예술, 텔레마틱 상상력, 테크노에틱 전환을 통해 미디어아트를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와 참여, 원격 현존의 시스템으로 다시 읽는다.

media-artmedia-theorycyberneticstelematic-artinteractive-artdistributed-authorship

텔레마틱 네트워크를 암시하는 추상 설치 이미지

미디어아트에서 “상호작용”이라는 말은 너무 쉽게 소비된다. 관객이 버튼을 누르고, 센서가 반응하고, 화면이 바뀌면 작품은 곧 인터랙티브하다고 불린다. 그러나 로이 애스콧을 경유하면 질문은 조금 더 까다로워진다. 반응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반응이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가, 누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었는가, 저자성은 어디까지 분산되었는가이다.

애스콧은 예술을 고정된 오브제의 제작보다 피드백, 참여, 원격 연결, 감각의 재훈련으로 이해한 이론가이자 예술가, 교육자였다. 1960년대 사이버네틱 예술과 행동주의적 교육 실험에서 출발한 그의 사유는 1980~90년대 텔레마틱 예술을 거쳐 후기의 테크노에틱 아츠로 확장된다. 이 긴 이동은 기술 유행의 목록이 아니라 작품의 존재 방식이 바뀌는 과정이다. 작품은 더 이상 닫힌 물건이 아니라 사람, 기계, 규칙, 지연, 신호, 환경이 서로를 조정하는 사건이 된다.

오브제에서 피드백 시스템으로

애스콧의 출발점은 사이버네틱스였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는 단지 기계 제어 이론이 아니라 예술을 보는 방식의 전환이다. 작품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입력과 반응, 조절과 실패, 반복과 변형이 만들어 내는 열린 시스템으로 읽힌다. 관객은 작품 바깥에서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조건을 바꾸는 참여자가 된다.

이 관점은 오늘의 인터랙티브 설치를 평가할 때 여전히 유용하다. 센서가 정교한가, 영상이 크고 선명한가, 실시간 처리가 빠른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관객에게 어떤 권한을 주는가이다. 관객이 단지 정해진 반응을 호출하는 방아쇠인지, 아니면 작품의 방향과 리듬, 의미의 배치를 실제로 바꾸는 노드인지가 핵심이 된다.

애스콧의 교육 실험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에게 미디어아트 교육은 장비 사용법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감각을 다시 훈련하고, 관계를 다르게 조직하며, 열린 시스템 안에서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가를 이미지 생산자가 아니라 상황과 피드백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텔레마틱 포옹과 분산 저자성

애스콧을 대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텔레마틱이다. 원격 통신 기술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의 작업에서 텔레마틱은 단순한 연결 인프라가 아니다. 떨어진 장소의 참여자들이 신호, 지연, 오해, 응답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공동으로 구성하는 미학이다.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감각, 하나의 저자에게 귀속되지 않는 서사, 네트워크 안에서 계속 갱신되는 작품성이 여기서 중요해진다.

1983년 작업으로 자주 언급되는 《La Plissure du Texte》는 이 문제를 잘 보여 준다. 여러 장소의 참여자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함께 서사를 만들어 가는 이 작업에서 작품의 핵심은 기술의 신기함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 중심과 주변, 개별 창작과 집단 창작의 경계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오늘의 공동 편집 문서, 온라인 퍼포먼스, 협업 플랫폼, 생성형 AI를 둘러싼 저자성 논쟁은 이미 이 질문 위에 서 있다.

그가 던진 “텔레마틱 포옹 안에 사랑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그래서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다. 네트워크는 차갑고 기능적인 전달 장치인가, 아니면 새로운 친밀성과 공동 감각을 조직할 수 있는가. 원격 현존은 현장의 빈약한 대체물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몸과 관계를 발명하는 조건인가. 애스콧은 이 질문을 기술 낙관주의로만 밀어붙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네트워크를 단순한 통신선이 아니라 관계 미학의 재료로 보게 만들었다.

테크노에틱 전환이 남긴 긴장

후기의 애스콧은 테크노에틱 아츠라는 이름 아래 기술과 의식, 감응, 영성, 행성적 연결을 함께 사유했다. 이 전환은 때로 모호하거나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사이버네틱스와 중기 텔레마틱 사유를 함께 놓고 보면, 그것은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이라기보다 같은 질문의 스케일 확장에 가깝다. 시스템이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면, 네트워크는 사람의 지각과 공동성도 바꿀 수 있는가. 기술은 효율 도구를 넘어 어떤 주의 상태와 존재 감각을 구성하는가.

물론 이 지점에서 비판도 필요하다. 네트워크가 늘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플랫폼은 참여를 약속하면서도 접속권, 기록권, 가시성, 수익 배분을 통제한다. 집단 창작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실제 명성과 책임은 불균등하게 분배될 수 있다. AI 협업 역시 인간과 기계의 공동 저작처럼 보이지만, 데이터 추출과 모델 소유, 인터페이스 규칙은 특정 기업과 제도의 권력 안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애스콧을 오늘 다시 읽는 일은 그의 유토피아를 그대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일에 가깝다. 참여라고 부르는 구조 안에서 누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가. 연결이 많아질수록 책임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시스템은 감각을 확장하는가, 아니면 부드럽게 제어하는가. 애스콧은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을 때 더 현대적인 이론 자원이 된다.

AI 시대의 애스콧 읽기

생성형 AI와 실시간 협업 환경은 애스콧의 문제의식을 다시 현재로 불러낸다. 오늘의 작품은 점점 더 하나의 이미지나 영상보다 프롬프트, 모델, 데이터셋, 인터페이스, 관객 입력, 플랫폼 규칙이 얽힌 과정으로 나타난다. 결과물만 보면 저자가 누구인지 분명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생성 과정은 이미 분산되어 있다.

이때 애스콧은 AI 미디어아트를 기술 시연이나 스타일 생산으로만 보지 않게 한다. 중요한 것은 모델이 얼마나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관계 구조가 만들어졌는가이다. 작가와 관객, 데이터 제공자와 플랫폼, 알고리즘과 운영자 사이에서 권한과 책임은 어떻게 배치되는가. 참여자는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설계된 선택지 안에서 반응만 제공하는가.

한국의 미디어아트 현장에서도 이 질문은 실용적이다. 몰입형 전시, 인터랙티브 설치, AI 워크숍, 네트워크 퍼포먼스가 늘어날수록 “관객 참여”라는 말은 더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애스콧식으로 묻는다면 참여의 깊이는 장비의 화려함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작품이 관객을 데이터 포인트로만 사용하는지, 아니면 공동 감각과 공동 판단의 구조를 여는지가 갈림길이 된다.

끝내 남는 질문

로이 애스콧의 가치는 그가 미래를 정확히 예언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미디어아트를 결과물보다 관계의 설계로 보게 만들었다. 이 관점은 사이버네틱 설치에도, 텔레프레즌스 퍼포먼스에도, 생성형 AI 협업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네트워크가 작품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더 많은 연결을 얻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제어를 얻는가. 그리고 공동 저자성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 공동의 권한까지 만들어지고 있는가. 애스콧을 오늘 읽는 이유는 바로 이 불편한 판단 기준을 회복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