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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10.29

김성환이 집을 다시 쓰는 방법

김성환의 영상 《Temper Clay》에서 집과 가족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배치되는지 살피고, 영상이 전시장과 건물 외벽으로 옮겨 갈 때 관객의 자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읽습니다.

media-art김성환영상설치TemperClay

떨어져 놓인 집의 벽과 문, 의자와 커튼이 작은 무대처럼 배치되고 나무 그림자가 그 위를 가로지르는 개념 이미지

표지는 글의 주제를 표현한 AI 생성 개념 이미지입니다. 김성환의 작품 장면이나 실제 전시 공간을 재현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어릴 때 살던 집을 찍으면 무엇이 기록될까. 방의 크기와 창문의 방향, 가족이 쓰던 물건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집도 누구에게는 소유한 재산이고, 누구에게는 일하러 드나드는 장소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물려받을 미래다. 한 주소에 모여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집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과 그 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김성환의 2012년 영상 《Temper Clay》는 이 간격을 생각하게 한다. 부모의 집과 가까운 사람들을 작업에 불러오지만, 그 재료를 가족의 추억으로만 묶지 않는다. 익숙한 장소는 촬영의 세트가 되고, 이미 맺어진 관계는 다른 역할을 시험하는 조건이 된다. 여기서는 작가의 작품 설명과 미술관의 전시 기록·인터뷰를 바탕으로, 집을 다시 쓰는 이 방법을 살펴보려 한다.

기억 속 장소와 소유한 장소 사이

작가는 《Temper Clay》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다시 그리는 작업으로 설명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아버지와 딸들 사이에서 재산과 사랑, 충성, 계급의 지속이 얽히는 관계다. 촬영에는 서울과 포천에 있는 부모의 부동산을 세트로 사용했고, 부모와 일하던 사람들을 영화의 인물이나 제작진으로 다시 고용했다고 밝힌다.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는 행위를 그저 향수로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설명이다. 작가의 《Temper Clay》 설명

이 출발점에서 집은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 이상이 된다. 누가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고, 누구의 노동으로 일상이 유지되며, 누가 그 시간을 자기 기억으로 말할 수 있는지가 함께 들어온다. 카메라가 가족의 사적인 장소를 비춘다는 사실만으로 친밀한 진실에 도달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친밀함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도 화면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재고용이라는 말에는 특히 긴장이 있다. 익숙한 관계가 작품으로 옮겨 와도 고용 관계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등장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과 제작 과정의 권한이 똑같이 나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공개된 작가 설명만으로 참여자 사이의 모든 협상 과정을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이 작업의 의미를 “영화가 가족의 위계를 해소했다”는 결론에 두기보다, 기존의 관계를 다른 일을 해 볼 재료로 삼았다는 데서 읽는 편이 신중하다.

이렇게 보면 자기 삶을 작품에 쓴다는 말도 달라진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세히 고백하는 것만이 자전적 재료를 다루는 방법은 아니다. 이미 주어진 집과 관계가 어떻게 나를 만들었는지, 그 재료로 다른 구성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방법도 있다. 같은 장소에 돌아가는 행동이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의 편집이 되는 순간이다.

가족을 설명하는 대신 장면을 엮는다

MoMA의 전시 소개에 따르면 이 영상에는 안무된 행동, 낯선 몸짓, 되풀이되는 일상의 동작이 들어간다. 목소리와 글은 여러 출처에서 오며,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돌봐 주었던 사람의 인터뷰도 포함된다. 음악가 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dogr)는 사운드트랙의 협업자로 명시되어 있다. 부모의 집이라는 재료가 한 사람의 설명으로만 닫히지 않는 구성이다. MoMA의 작품·전시 소개

이런 구성을 읽을 때 모든 몸짓을 하나의 상징으로 해독하려 들면 곧 막힐 수 있다. 어떤 인물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정답을 찾는 동안, 행동이 반복되는 방식이나 목소리가 다른 재료와 만나는 방식은 놓치기 쉽다. 가족에 관한 영상을 이해하는 경로는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데만 있지 않다. 장면이 서로를 어떻게 바꾸어 읽게 하는지 살피는 길도 있다.

인터뷰의 말을 영화에 넣는 일과 인터뷰를 그대로 증언 자료로 제시하는 일 역시 같지 않다. 말은 누가 언제 했는지에 관한 정보이면서, 편집된 영상 안에서는 길이와 간격, 앞뒤 장면에 따라 다른 힘을 얻는다. 이때 중요한 질문은 사실과 허구 중 어느 한쪽에 작품을 분류하는 것만이 아니다. 실제 관계에서 나온 재료가 어떤 형식을 거쳐 관객 앞에 놓였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집과 가족을 다룬 작품은 종종 보편적인 공감을 먼저 요구받는다. 하지만 모두에게 익숙한 가족 이야기라고 정리하면, 그 집에만 있는 소유와 노동의 차이가 지워질 수 있다. 반대로 사적인 배경을 모두 알아야만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기면, 이미지와 소리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힘을 놓친다. 《Temper Clay》의 설명 자료는 두 방향을 함께 보게 한다. 구체적인 삶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 삶의 해설만으로 끝나지 않는 구성이다.

숲처럼 보이는 곳을 만드는 카메라

2021년 MoMA 인터뷰에서 김성환은 영상 속 숲처럼 보이는 장소가 실제로는 아파트와 도로 사이의 좁은 공원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건물을 지지대처럼 활용하고 긴 망원렌즈로 촬영해 그곳이 자연처럼 보이게 했다고 말한다. 또한 흑백과 선의 관계, 멀리서 가까운 장면을 찍는 방식에 관해 설명한다. 이것은 촬영 장소를 확인하는 정보이면서, 풍경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드러내는 단서다. 김성환의 MoMA 인터뷰

도시의 집과 자연의 풍경을 서로 반대편에 놓으면 쉽게 읽히는 이야기가 생긴다. 답답한 주거 공간 바깥에 자유로운 숲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설명을 알고 나면 그 구분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 자연처럼 보이는 이미지 안에도 건물과 도로의 배치가 관여하고, 카메라는 그 관계의 일부를 보여 주거나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풍경의 인상은 장소의 성격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이 점을 단순히 관객을 속이는 촬영 기법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영상은 언제나 어떤 위치와 범위에서 세계를 잘라 낸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무엇을 생각하게 하느냐다. 여기서는 집 바깥의 풍경마저 집의 조건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내를 떠났다고 곧바로 소유와 개발의 관계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읽기는 전시에서 이미지의 규모를 키우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숲을 크게 투사한다고 장소의 전체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프레임 안에 무엇이 있는지와 함께, 그 프레임이 어떤 위치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김성환의 촬영 설명은 영상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만든 선택까지 작품의 문제로 가져오는 실마리가 된다.

화면 밖에서도 달라지는 자리

《Temper Clay》는 전시되는 형식에 따라서도 달리 구성되었다. MoMA의 2021년 전시는 단채널 영상을 드로잉과 오브제로 확장해, 영상 속 공간과 관객이 머무는 공간을 연결했다. 작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좌석이 단순히 앉는 도구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고 설명한다. 전시 공간에는 안내를 따르려는 마음과 그 방향을 피하려는 마음, 돌아다니려는 마음과 귀 기울이려는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MoMA 전시 기록, 작가 인터뷰

아트선재센터의 2014년 배너 프로젝트에서는 다른 이동이 있었다. 영상의 한 장면이 건물 뒤편 외벽에 큰 인쇄 이미지로 놓였다. 센터는 여성의 얼굴 자리에 종이와 불의 이미지가 놓인 장면을 소개하면서, 배너 프로젝트가 전시장 안의 관객뿐 아니라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과도 만나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영상 전체의 시간과 소리가 그대로 옮겨 간 것은 아니다. 한 장면이 다른 규모와 장소에서 새롭게 제시된 것이다. 아트선재센터 배너 프로젝트 기록

두 사례를 함께 살피면 영상의 공개를 파일의 재생 여부로만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전시장에서는 머무를 자리와 시선의 방향이 관람을 조직하고, 외벽에서는 지나가던 사람의 시간이 이미지와 만난다. 같은 작업에서 나온 재료여도 보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행동이 달라진다. 작품을 다른 장소에 놓는 일은 내용의 운반이면서 관객의 자리를 다시 편집하는 일이 된다.

김성환이 집을 다시 쓰는 방법은 이처럼 여러 단계에서 이어진다. 살던 장소는 촬영의 세트가 되고, 가까운 관계는 영화의 역할과 제작 과정에 들어가며, 영상은 다시 관객이 머무는 공간의 일부가 된다. 그 이동이 모든 관계를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처음부터 정해진 듯 보였던 자리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게 한다. 집의 이야기를 보존하는 일과 집에 주어진 역할을 다시 묻는 일이 한 작업 안에서 만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