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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07.29

기계가 욕망의 몸을 얻을 때

최우람의 기계생명체가 가상의 종에서 경쟁과 위기를 드러내는 사회적 우화로 이동해 온 과정을 《Round Table》과 《Little Ark》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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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생명체와 사회적 경쟁의 구조를 추상화한 개념 이미지

최우람의 실제 작품이나 전시 장면이 아니라, 이 글의 주제를 추상화한 생성 이미지다.

금속 갈비뼈가 천천히 벌어지고 기어와 모터가 일정한 박자로 움직인다. 구조를 들여다보면 분명 기계인데, 조금 떨어져 보면 숨을 쉬거나 몸을 웅크린 생물처럼 느껴진다. 최우람은 이 어긋남을 오랫동안 다뤄 왔다. 그가 만든 것은 생물을 닮은 장치이면서, 인간이 기계에 투사한 생명과 욕망을 되돌려 보는 조각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최우람이 1990년대 초부터 살아 있는 듯한 기계 작업을 만들어 왔으며, 작품마다 허구의 배경 서사를 붙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초기의 기계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은 종처럼 등장했다면, 2022년 《Little Ark》에 이르러 그 생명성은 사회적 경쟁과 불안, 생태 위기를 다루는 환경으로 넓어진다.

가상의 종에서 사회의 몸으로

최우람의 기계는 작동 원리를 감추지 않는다. 금속 프레임과 관절, 케이블이 그대로 보이고, 움직임을 만드는 장치도 조각의 표면에 남는다. 관객은 기계임을 알면서도 그 반복에서 호흡과 경계심, 피로를 읽는다. 생명처럼 보이게 만드는 매끈한 환영보다 실제로 움직이는 구조가 먼저다.

초기 작업에서 허구의 종과 진화 서사는 도시 안에 또 다른 생태계가 있다는 상상을 열었다. 이 방식은 기계를 낯선 타자로 보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타자는 인간 사회와 더 닮아 갔다. 기계생명체의 움직임은 번식과 생존의 몸짓을 넘어, 서로 밀어내고 출구를 찾으며 같은 자리를 맴도는 집단의 행동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경쟁은 어떻게 조각이 되는가

《Round Table》(2022)은 이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설명에 따르면 머리가 없는 짚 인물상 18개가 검은 원탁을 받친다. 탁자 위에는 둥근 머리 하나가 굴러다닌다. 인물들이 몸을 움직일수록 머리는 계속 다른 자리로 밀려난다. 누구도 머리를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지만 경쟁은 멈추지 않는다.

천장에서는 재활용 골판지 조각으로 만든 세 마리의 《Black Birds》가 천천히 선회하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새들은 경쟁을 끝내지 않고 관망한다.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이 반복되는 동안, 관객은 그 구조를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 의식하게 된다.

작품의 움직임은 경쟁을 시간 속에 붙잡는다. 머리가 밀리고 몸이 다시 반응할 때마다 같은 조건이 되풀이된다. 관객도 그 반복을 지켜보는 위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어렵다.

방주는 누구를 싣고 어디로 가는가

같은 전시의 《Little Ark》(2022)는 무거운 철과 재활용 골판지로 만든 상징적 방주다. 35쌍의 노는 벽처럼 서 있다가 날개를 펼치듯 움직인다. 배 위와 주변에는 서로 반대 방향을 보는 선장들, 닻, 등대, 끝없이 이어지는 공간과 출구 영상이 배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기후 변화와 사회·정치·경제 위기 속에서 방주를 주제로 삼아 동시대의 모순된 욕망을 나란히 놓은 퍼포먼스 형식의 전시라고 소개했다.

방주는 보통 구원의 약속을 품지만 이 배의 방향은 분명하지 않다. 《Exit》에서는 문이 열리고, 그 뒤에 다시 닫힌 문이 나타난다. 출구를 향한 움직임은 탈출을 보장하지 않는다. 《Round Table》의 경쟁과 《Little Ark》의 항해를 함께 보면, 최우람의 기계는 위기 속에서도 같은 욕망을 반복하는 사회의 몸에 가까워진다.

재활용 골판지와 철이 함께 쓰인 점도 이 읽기를 물질로 붙든다. 연약하고 버려지기 쉬운 재료가 정교한 구동 장치와 결합해 거대한 생명처럼 움직인다. 기술은 새것의 광택보다 잔해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남는 판단

최우람의 작업을 기계공학의 정교함만으로 보면 움직임이 만든 사회적 시간을 놓치게 된다. 모든 동작을 정치적 상징으로만 읽어도 허구의 종과 조각적 구조가 주는 낯섦이 사라진다. 그의 기계생명체는 두 해석 사이에서 살아난다. 우리는 그것이 기계임을 알면서도 생명처럼 대하고, 그 움직임 속에서 결국 인간 사회의 욕망을 발견한다.

이 작품들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우리가 만든 경쟁과 탈출의 구조는 왜 기계의 반복 운동처럼 익숙해졌을까.

참고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