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몸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폴 서먼의 《Telematic Dreaming》과 켄 골드버그·조지프 산타로마나의 《Telegarden》을 통해 원격현존이 만드는 친밀함, 먼 곳에 작용하는 행위, 그 결과가 남는 장소를 살핀다.

표지는 원격현존의 감각과 행위를 표현한 생성 개념 이미지다. 실제 작품이나 전시장을 촬영한 사진이 아니다.
침대 위에 투사된 다른 사람의 손을 향해 손을 뻗는다면, 두 사람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살갗은 닿지 않지만 상대는 내 움직임에 반응한다. 반대로 화면의 버튼을 눌러 먼 곳의 식물에 물을 준다면, 나는 그 정원에 가본 적이 없어도 그곳에서 무언가를 한 셈이다. 첫 장면은 접촉 없이 가까움을 만들고, 두 번째 장면은 가까움 없이 물리적인 결과를 남긴다.
미디어아트의 원격현존, 곧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는 이 어긋남에서 읽을 수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몸이 지각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장소가 갈라지고, 장치가 그 사이를 잇는다. 화면이 얼마나 선명한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연결에서 어떤 감각이 전달되고 어떤 행위가 허용되는가다. 폴 서먼의 《Telematic Dreaming》과 켄 골드버그·조지프 산타로마나의 《Telegarden》은 이 질문을 서로 다른 재료로 펼친다.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 원격 경험을 현장 경험의 부족한 복제라고만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거리가 사라졌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거리는 남아 있으며, 작품은 그 거리를 건너는 방식과 건너지 못하는 감각을 드러낸다.
같은 침대의 이미지, 서로 다른 몸의 자리
서먼의 작가 설명에 따르면 《Telematic Dreaming》은 1992년 6월 핀란드 카야니에서 처음 제작됐다. 설치는 ISDN 디지털 전화망으로 떨어진 두 장소를 연결한다. 밝은 공간의 침대 위 카메라가 한 참여자의 모습을 촬영하고, 어두운 공간의 다른 침대 위 프로젝터가 그 영상을 비춘다. 그곳에는 다른 참여자가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겹친 장면을 두 번째 카메라가 다시 촬영해 첫 번째 참여자 주변의 모니터로 돌려보낸다.[1]
여기서 영상은 관객 앞의 직사각형 화면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의 몸 옆에 놓이고, 침대의 표면을 차지한다. 상대의 영상에 다가가면 내 몸과 그 영상이 함께 찍힌 모습이 상대에게 돌아간다. 이 왕복 때문에 사람은 타인의 몸을 보면서 동시에 타인과 함께 나타나는 자신의 몸도 보게 된다. 자기 움직임의 결과를 타인의 반응 속에서 확인하는 구조다.
서먼은 손을 눈으로 대신하는 감각의 이동으로 이 경험을 설명한다.[1] 이를 실제 촉각이 통신망을 타고 전달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작가가 기술한 장치는 카메라, 프로젝터, 모니터와 영상 연결이다. 압력이나 체온을 전달하는 촉각 장치가 있다는 설명은 없다. 그럼에도 친밀한 사물인 침대와 상대의 반응은 시각적 겹침을 접촉의 기대와 연결한다. 이때 촉각의 부재는 단순한 결함으로만 남지 않는다. 만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 차이가 작품의 긴장을 만든다.
이 장면에 대한 나의 해석은 가까움이 거리의 반대말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도 영상 속 내 몸 곁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영상이 가까이 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몸에 대한 권한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원격 참여를 설계한다면 상대가 물러날 여지, 자신의 모습을 보낼 범위, 연결을 멈출 방법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는 이 작품의 실제 운영 규칙을 보고하는 말이 아니라, 그 구조에서 오늘의 제작자가 가져올 수 있는 질문이다.
화면을 떠난 물 한 방울
《Telegarden》에서는 연결의 결과가 다른 방식으로 남는다. 골드버그의 프로젝트 기록은 공동 디렉터를 켄 골드버그와 조지프 산타로마나로 명시한다. 이 작업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개발돼 1995년 6월 온라인에 공개됐고, 1996년 9월 오스트리아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센터로 옮겨져 2004년 8월 가동을 마쳤다.[2] 지금 소개하는 것은 당시 운영된 작품이지, 현재 접속해 조작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다.
참여자는 웹에서 산업용 로봇 팔을 통해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며 식물의 성장을 관찰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회고는 정원을 두 대의 카메라로 볼 수 있었고, 이용자들이 식물에 일상적으로 물을 주는 책임을 맡았다고 설명한다.[3] 화면 안의 식물이 자라는 애니메이션과 달리, 이 작품의 행위는 원격 장소에 있는 흙과 식물에 영향을 미쳤다. 클릭의 결과는 화면을 닫아도 그곳에 남는다.
주목할 점은 제어 장치의 속도와 식물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로봇이 요청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씨앗이 자라는 것은 같은 시간 단위로 판단할 수 없다. 물을 준 행위를 확인하는 것과 그 돌봄이 식물에 어떤 결과를 냈는지 아는 것 사이에는 기다림이 있다. 나는 이 간격이 《Telegarden》을 단순한 원격 조작 시연에서 떼어놓는다고 본다. 작품은 한 번의 성공적인 입력보다 돌아와서 다시 살피는 관계를 요구한다.
또한 프로젝트의 역사적 설명은 정원을 보는 방문자와 심고 물을 줄 권한이 있는 회원을 구분하고, 활동 기록이 공동체의 자율 운영에 쓰였다고 적고 있다.[2] 연결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에게 같은 행동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원격현존에는 보는 위치와 손을 뻗을 수 있는 범위가 따로 설계돼 있다. 이를 민주적 공동체의 성공이 자동으로 증명된 사례로 확대할 필요는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정원을 공유하며 관찰과 조작의 권한을 나누었다는 구체적인 구조다.
《Telematic Dreaming》에서 만질 수 없는 몸의 영상은 친밀한 거리로 들어왔다. 《Telegarden》에서는 몸을 옮기지 않은 사람의 행위가 물질에 닿았다. 이 차이는 원격현존을 하나의 몰입감 점수로 줄일 수 없는 이유다. 함께 있는 듯한 감각과 다른 장소를 바꾸는 능력은 겹칠 수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연결된다는 말에 가려지는 것
에두아르도 카츠는 「Telepresence Art」에서 원격현존 예술을 통신, 로보틱스, 인간과 기계의 인터페이스, 컴퓨터의 결합으로 논의한다. 그의 관심은 기술적 묘기나 그곳에 있다는 놀라운 느낌에만 있지 않다. 참여자의 움직임과 시선, 조작이 원격 환경에 영향을 주고 다시 영향을 받는 상호 관계를 통해, 일방향적인 소통 구조를 질문한다.[4] 이 설명은 특히 《Telegarden》처럼 지각과 행동이 장소 사이를 왕복하는 작업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로봇을 쓰지 않는 원격 친밀성의 작품까지 모두 같은 장치로 설명하는 정의는 아니다.
이 글에서는 원격현존을 라이브니스와도 구별한다. 라이브니스의 질문이 지금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감각을 향한다면, 원격현존의 질문은 내 몸이 어디를 보고 어디에 작용하며 누구와 같은 장면을 이루는지를 향한다.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영상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장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작은 화면과 제한된 조작만으로도 먼 곳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성립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표성의 질문도 따라온다. 화면이 원격 장소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엇이 그 화면과 그 장소를 실제로 연결하는지 따져야 한다. 그럴듯한 모습은 연결의 증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지금 들어오는 카메라 영상, 과거의 녹화, 미리 만든 시뮬레이션은 겉으로 비슷해도 참여자가 하는 일의 의미를 다르게 만든다. 이것은 두 작품에 조작이나 기만이 있었다는 의혹이 아니다. 그 작품들을 참조해 새로운 설치를 만들 때 명확히 해야 할 구분이다.
가령 통신이 끊겼을 때 마지막 영상을 계속 보여주는 설계를 생각해 보자. 화면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관객은 여전히 반응을 주고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로봇 조작 요청을 보낸 뒤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에는 무엇이 실제로 실행됐는지 알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각적 매끄러움과 참여의 명료함이 충돌한다. 끊김을 감추는 연출이 작품의 일부라면 그렇게 설명해야 하고, 실제 원격 조작을 약속했다면 실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연결의 한계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도 미학적 선택이다.
떨어져 있음을 남겨 두는 설계
이 두 작업에서 가져올 수 있는 제작 원칙을 하나 제안하고 싶다. 원격 설치를 구상할 때 장비 목록 옆에 관객의 몸이 있는 장소와 행위의 결과가 남는 장소를 따로 그려 보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돌아오는 것은 영상인지, 소리인지, 장치의 반응인지 구체적으로 적는다. 이 간단한 그림만으로도 관객이 보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는 앞선 작품의 제작 매뉴얼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례를 읽으며 도출한 설계 제안이다.
영상만 왕복한다면 접촉의 기대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살필 수 있다. 실제 장치를 움직인다면 입력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와 이미 실행됐지만 영상만 늦게 왔을 때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살아 있는 대상을 다룬다면 참여자가 접속하지 않는 시간에도 누가 그곳을 돌보는지 물어야 한다. 원격으로 열린 작품에도 현장에 남는 일이 있다.
관람할 때에도 해상도나 신기함을 평가하기 전에 잠시 멈춰볼 수 있다. 지금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타인의 몸인가, 몸의 영상인가. 내 행동에 반응한 것은 다른 사람인가, 원격의 물질인가, 내 앞의 프로그램인가. 이 구분은 어느 하나를 가짜로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계를 같은 말로 뭉개지 않기 위한 것이다.
원격현존의 흥미는 끝내 거리를 지우는 데만 있지 않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친밀함이 생기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내 행동의 결과가 남는다. 그때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거기 있는 것처럼 느꼈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거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누구의 곁에 남았는가.
출처
[1] Paul Sermon, Telematic Dreaming — Statement. 최초 제작 시기, 두 장소의 침대·카메라·프로젝터·모니터 구성, 감각 이동에 관한 작가 설명.
[2] Ken Goldberg, The Telegarden (1995–2004). 공동 디렉터와 프로젝트 연혁, 원격 식재·급수, 관찰과 조작 권한의 구분. 페이지에 남아 있는 현재형 문장은 당시 설명으로 읽었다.
[3] Mario Schmidhumer, Throwback: Telegarden, Ars Electronica, 2021. 카메라와 로봇을 통한 원격 정원 관리, 참여자의 급수 책임에 관한 기관 회고.
[4] Eduardo Kac, Telepresence Art. 원격 시각·행위와 상호적 소통 구조에 관한 작가의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