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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Art Article · 2026.09.13

키틀러는 왜 기록 장치부터 읽었는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담론 네트워크와 축음기·필름·타자기 논의를 따라, 기록 장치가 무엇을 남기고 읽을 수 있게 하는지 살핀다. 소프트웨어의 물질적 실행 조건을 미디어아트 제작과 비평에 연결하되 기술결정론의 한계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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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인 진동과 빛의 면, 분리된 기록 단위를 겹친 추상 개념 이미지

표지는 기록 방식의 차이를 표현한 AI 생성 개념 이미지이며, 실제 작품이나 전시의 기록 사진이 아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글로 옮길 때 우리는 말의 내용을 남긴다. 녹음에는 문장으로 옮기지 않은 숨소리와 방 안의 울림도 들어갈 수 있다. 같은 발언의 기록이어도 나중에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면 발언의 의미뿐 아니라 기록 장치가 무엇을 받아들이는지도 살펴야 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매체이론은 이 지점에서 출발하기에 유용하다. 작품이나 문학을 해석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장치와 제도 안에서 기록되고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인간이 먼저 완성한 의미를 매체에 담았다고 생각하면 놓치는 조건들이다.

이 질문은 미디어아트를 설명하는 글에도 필요하다. 작품 설명에는 기억과 정체성, 참여의 의미가 등장하지만, 센서가 받아들이지 못한 움직임이나 저장하지 않은 소리는 그 해석에 들어올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키틀러를 읽는 이유는 모든 작품을 기계의 결과로 환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품이 의미를 얻기까지 통과한 기록 조건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다.

읽는 사람을 만드는 기록 체계

『Discourse Networks, 1800/1900』의 영문판은 1990년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됐다.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역사적 시기와 사회구조, 기술과 소통 체계가 무엇을 말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지 연결해 읽는다. 여기서 담론 네트워크는 오늘날의 소셜 네트워크를 뜻하지 않는다. 문학이 생산되고 읽히는 조건을 함께 분석하기 위한 역사적 틀에 가깝다. 출판사 책 소개

책의 1800년 부분에는 언어를 배우는 방식, 근대 대학의 등장, 동시대 문학의 해석과 정전화가 함께 들어간다. 1900년 부분에서는 영화와 사진, 타자된 페이지가 문학 생산에 일으킨 위기를 다룬다. 이 구성에서 읽기와 쓰기는 시대를 초월한 개인의 능력으로만 취급되지 않는다. 교육과 기관, 기록 기술이 어떤 독자와 저자를 가능하게 했는지까지 살핀다.

그러므로 키틀러의 논의를 낡은 기계를 수집하는 취향과 동일시하면 곤란하다. 축음기나 타자기의 외관을 전시장에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장치가 어떤 기록을 허용했고, 그 기록을 누가 만들거나 읽을 수 있었는지도 드러나야 한다. 이 대목은 책의 역사적 분석에서 미디어아트 비평으로 가져와 볼 만한 질문이다.

말의 내용 밖에 남는 것

『Gramophone, Film, Typewriter』의 영문판은 1999년에 출간됐다. 출판사는 이 책을 『Discourse Networks, 1800/1900』 후반부의 연장이자 상세한 전개로 설명한다. 분석의 중심은 19세기 말 새로운 매체가 인쇄된 말의 지배력을 흔들었던 변화다. 출판사 책 소개

출판사 소개가 강조하는 구별은 명료하다. 글쓰기가 기록 대상을 문자 기호로 매개했다면, 축음과 사진·영화는 음파와 빛의 물리적 효과를 기록할 수 있었다. 타자기는 글쓰기를 한 개인의 고유한 표현으로 보는 관점에서, 물질적인 기호의 연속으로 보는 관점으로 옮겨 놓았다. 키틀러는 이 변화와 문학·정신분석의 반응을 함께 읽는다.

이 구별을 이해하는 데 글과 녹음의 차이가 도움이 된다. 발언을 받아 적는 사람은 어떤 소리를 말로 인정하고 어떻게 문장으로 정리할지 판단한다. 녹음 장치는 그 판단과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받아들인다. 말뜻으로 선택되지 않은 소리도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이것을 녹음이 현실 전체를 손실 없이 보존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장치의 수음 범위와 기록 방식은 여전히 남는 것을 제한한다.

미디어아트에서 이 관점은 기록된 내용과 기록 형식을 함께 보게 한다. 예컨대 관객의 발화를 텍스트로 바꾸어 보여 주는 작업을 상정해 보자. 말의 뜻은 화면에 남아도 목소리의 떨림은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소리의 진폭으로만 조명을 움직이게 하면 발화의 문장 구조는 제어값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특정 작품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기록 형식의 선택이 작품에서 무엇을 드러내거나 배제하는지 비교하기 위한 가정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매체가 더 진실한지 서열을 정하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보존하는 형식인지 구별하는 일이다. 기록된 결과만 읽으면 자연스러워 보이는 선택도, 변환 과정을 되짚으면 작품의 구체적인 결정으로 보인다.

화면 아래에서 실행되는 소프트웨어

키틀러의 「There is No Software」는 CTheory에 1995년 10월 18일자로 게재돼 있다. 제목만 보면 프로그램이나 개발 작업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워드프로세서의 실행을 운영체제와 BIOS, 전압 차이의 층위로 내려가며 설명한다. 소프트웨어가 기계와 독립된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겨냥하는 논의다. 게재 정보와 원문

본문에서 키틀러는 WordPerfect와 DOS를 사례로 든다. 사용자가 프로그램 이름을 입력하는 행위와 실제 실행 사이에는 파일을 찾아 메모리에 올리고 실행을 넘기는 운영체제의 작업이 있다. 그 아래에도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조건이 이어진다. 이 설명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화면에서 하나의 명령으로 보이는 일이 실제로는 무엇에 의존하는가.

이 글의 DOS와 BIOS 설명은 당시의 컴퓨팅 환경에 묶여 있다. 이를 오늘의 모든 운영체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또한 물리적 실행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인터페이스 설계나 프로그래밍 언어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소프트웨어의 추상화가 실제로 하는 일을 인정하면서, 그 추상화가 감추는 의존성도 살펴야 한다.

미디어아트 제작에 적용한다면, 화면에 보이는 효과와 이를 실행하는 조건을 함께 기록할 수 있다. 실시간 반응이 작품의 일부라면 입력이 들어온 뒤 화면이 바뀌기까지의 지연을 확인해야 한다. 같은 코드라도 재생 장치나 입력 경로가 달라지면 작품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야 한다. 이는 키틀러가 제시한 제작 매뉴얼이 아니라, 그의 질문을 작업 과정에 옮긴 필자의 제안이다.

장치를 읽되 사람을 지우지 않기

키틀러의 분석을 따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은 기술적 조건을 유일한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장치가 어떤 기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만으로, 누가 그 장치를 소유하고 누구의 경험을 기록할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작업 사이에도 제작자의 판단과 전시 기관의 선택, 관객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르다.

이것은 키틀러의 책 전체가 제도나 사회를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과는 구별해야 한다. 『Discourse Networks, 1800/1900』의 구성 자체가 교육과 대학, 문학 제도를 포함한다. 여기서 경계할 대상은 그의 논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발견한 뒤 사람과 제도의 결정을 분석에서 빼버리면, 처음 던졌던 질문도 좁아진다.

작품을 만들거나 설명할 때는 기술 명세와 해석을 떨어뜨려 놓지 않는 편이 낫다. 참여를 말하는 작품이라면 무엇이 입력으로 인정되는지 함께 밝힐 수 있다. 기억을 다룬다면 원래의 소리와 이미지가 어떤 형식으로 바뀌었고 무엇이 남지 않았는지 살필 수 있다. 모든 회로를 공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주장에 영향을 주는 기록과 변환의 조건을 관객이 짚어 볼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다.

키틀러를 읽고 전시를 다시 본다면, 작품 설명 옆에 다른 질문 하나를 놓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더해, 무엇이 기록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가. 그 질문은 장치의 성능을 칭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작품 안에 들어오지 못한 소리와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 선택까지 보게 한다.